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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문장을 베껴 (새로) 쓰다
96.문장을 베껴 (새로) 쓰다
비교과통합센터2014-12-23

눈이 내린다. 작고 흰 새떼의 무리가 지상의 가장 낮은 데로 몰려다닌다. 12월에 내리는 눈은 한 해를 마감하는 책의 표지다. 슬프고 아쉬웠던 일도 흰 눈에 덮혀 두툼한 책이 된다. 눈 덮힌 세상은 백지와 같다. 옛말에 ‘눈 길을 걸을 때 자신의 발자국을 조심해야 한다.(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고 했다. ‘글쓰기 첫걸음’이라는 이 글의 제목도 그러하다. 글쓰기의 길을 잘못 알려주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글에는 세상에 대한 글쓴이의 판단이 드러나야 한다. 판단력이 좋은 글쓴이는 잘 벼려진 칼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아서 핵심을 신속하게 분리해낸다. 이른바 쾌검의 경지다. 다음은 표현력의 문제다. 자신의 주장을 감동, 유머, 반전, 정보로 버무려 넣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음 세 가지를 유념하자.

첫째, ‘왜 쓰는 가’에 대한 자의식이 필요하다. 글쓰기는 ‘왜’라는 목적지로 가는 약도다.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신형 네비게이션도 쓸모없다. 그런데 내게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어떻게 쓰는 지’를 묻는다. 대부분 글쓰기의 목적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글을 잘 쓰기 위한 ‘어떻게’의 정답은 없다. 다만 쓰임에 따른 모범 답안이 있을 뿐이다. ‘왜 쓰는 가’의 절실함이 가득 찰수록 그 글은 특별해진다. 글은 사고의 표현이며 사고는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이해(관점)법니다. 대상을 요약·분석하는 자신만의 눈이 없는데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둘째, 문장을 오래 써야 한다. 이 말은 퇴고를 많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퇴고의 기본은 글은 줄일수록 좋아진다는 것. 글이 간결하고 정확해야 의미전달이 쉽다. 우리말에는 서술어가 강조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나는 너를 사랑해’와 ‘나는 사랑해 너를’이라는 문장의 의미는 다르다. 좀 더 수준 있는 퇴고를 하려면 우리말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다음 세 문장의 차이를 보자. ‘나는 너를 사랑해’, ‘나를 너만 사랑해’, ‘나는 너를 사랑했어’ 의미가 확 달라진다. 우리말에서 조사와 어미의 쓰임을 잘 알아도 좋은 글이 된다.

셋째, 좋은 문장을 베껴 쓰자. 글을 베껴 쓰면 언어 근육이 단련된다. 언어 근육은 어휘력과 표현력을 키운다.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이들은 ‘운동에 취하는 순간’이 온다고 한다. 베껴쓰기도 마찬가지. 글을 옮겨 적다보면 베껴쓰는 문장에 취하는 단계가 온다. 알콜이 온 몸으로 퍼지는 것처럼 문장이 자신의 몸으로 스며드는 경험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언어 근육을 단련하는 것은 꾸준한 연습 밖에 없다. 문장에 취하라.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이 취중에 튀어나오듯, 자신도 모르게 멋진 문장이 무의식에서 불쑥 튀어나올 것이다.

열린 창문 틈새로 눈송이는 앞 다퉈 뛰어든다. 실컨 놀다가 집 안으로 뛰어 들어온 어린 애들 같다. 지난 4년간 저 눈발들처럼 글을 썼다. 마감에 쫒겨 원고를 썼고, 여전히 사는 게 서툴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준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박태건 (글쓰기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