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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여, 달걀 값 물어내라
콜럼버스여, 달걀 값 물어내라
비교과통합센터2018-08-20

어떤 기업 광고에서 ‘콜럼버스의 달걀’을 소재로 삼아 상식을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을 강조하는 것을 보았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상륙이 뭐 별거냐고 시비가 붙자 즉석에서 달걀 세우기 논쟁이 벌어졌다. 콜럼버스가 달걀을 집어 들고 퍽 하니 그 밑동을 깨고 세웠다는, 소문으로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는 일이라는 것이 해놓고 보면 별것 아닌 듯싶지만 언제나 ‘최초의 발상 전환’이 어렵다는, 매우 자존심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하여 문제성을 느껴본 적은 없는가. 그 기업과 광고 작성자에 대해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명사적 의식 전반에 깔린 무의식의 성격에 문제를 제기해보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콜럼버스의 달걀이 이제는 상식을 넘는 발상이라기보다는 도리어 그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역사적 과정과 현실이다.

 

달걀의 겉모양은 어떻게 생겼는가? 그것은 타원형이다. 애초에 세울 이유가 없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둥지에서 구르더라도 그 둥지의 반경을 벗어나지 않도록 고안된 생명의 섭리가 담겨 있다. 만일 원형이었다면 굴렀을 경우 자칫 둥지에서 멀리 이탈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각이 졌다면 어미 새가 품기 곤란했을 것이다. 타원형은 그래서 생명을 지키는 원초적 방어선이다.

 

따라서 달걀을 세워보겠다는 것은 그런 생명의 원칙과 맞서는 길밖에 없다.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둥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만들어진 생명체를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고정시켜 장악해야겠다는 생각이 콜럼버스의 달걀을 가능하게 만드는 뿌리이다. 그래서 그것은 상식을 깬 발상 전환의 모델이 아니라, 생명을 깨서라도 자신의 구상을 달성하겠다는 탐욕적·반생명적 발상으로 확대된다.

 

실로 콜럼버스와 그의 일행은 카리브 해안과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금과 은을 얻기 위해 무수한 생명을 거리낌없이 살육했다. 결국 콜럼버스의 달걀은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뒷받침하는 사고의 원형이 된다.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아시아·아프리카·중동 등지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이 이런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달걀 세우기를 당했는지 모른다. 우리도 그 가운데 하나다.

 

콜럼버스의 손에서 달걀이 지표면에 내리쳐지기까지의 거리는 짧고 그 힘은 개인에게 한정되어 있지만, 그 거리와 힘 속에는 제국주의라는 문명사적 탐욕이 압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 달걀 세우기는 콜럼버스 시대 이후 여러 가지 변형된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가령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지구의 생명이 파괴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며, 지식수준만 높이면 된다는 교육관이 아이들의 정신 생명을 시들게 해도 무감각하며, 기득권을 독점하려는 생각은 국민의 정치 생명을 상처 내는 현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또한 팔아먹기만 하면 된다는 발상들은 음란물을 양산하여 인류의 문화 생명 그 밑동을 으스러뜨려 놓고 있다. 폐수로 범벅이 되었다는 한탄강의 비극은 이런 달걀 세우기의 상식이 도달하는 운명적 종착역이다.

 

정작 오늘날 필요한 발상의 전환은, 달걀을 어떻게 하면 세울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갇혀 그 답을 모색하는 일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달걀의 모양새가 왜 타원형인가를 진지하게 묻는 일에서 시작된다. 원래의 타원형을 지키는 새로운 노력이 ‘오늘의 상식’을 깨지 못할 때 생명의 신음 소리는 도처에서 계속 들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의 죽음으로 다가오게 된다. 바로 이러한 문명사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발상 전환의 출발점이 아닌가.

 

_김민웅·성공회대 교수

 

 

앞의 예문은 ‘콜럼버스의 달걀’을 통해 제국주의적 침탈의 세계관을 비판한 글이다. 이 글의 필자는 흔히 상식처럼 여겨지는 ‘콜럼버스의 달걀 세우기’를 뒤집어 새로운 사고 방법을 보여준다. 필자는 타원형인 달걀을 억지로 세우는 것은 반생명적 논리이며, 결국 이는 제국주의적 사고와 연관되었다고 보았다.

 

필자의 이런 생각은 아주 참신하고 새롭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창의적 발상의 예로 드는 ‘콜럼버스의 달걀’을 멋지게 다시 한 번 뒤집어 또 다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한 편의 글을 새로운 테마로 구성해내는 아이디어의 힘을 보여준다.

 

그런데 상식에 대한 도전이 과연 도전하려는 마음 하나만으로 가능할까? 이 글이 참신하고 좋은 글이라면 어떤 요소 때문일까?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데는 생물학적 지식과 제국주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콜럼버스가 창의적 인물로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실제로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뒤 거기서 나온 금이 신통치 않자 인디언을 학살하고 부역을 시켰으며, 노예로 삼기도 했다. 콜럼버스와 그 추종자들은 신대륙에서 수많은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 이미 신화가 된 상식을 뒤엎기 위해서는 콜럼버스에 관한 이런 사실들을 미리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이 글에 동원된 지식은 타원형이 갖는 생물학적 상식이다. 달걀이 둥지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도록 타원형으로 고안된 것이라는 생물학적 원리는 ‘콜럼버스의 달걀’을 비판하는 데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래서 필자는 타원형의 생물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콜럼버스의 달걀’에서 제국주의적 자취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글의 필자는 이런 사실을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다. 필자는 먼저 우리의 상식에 도전장을 던지면서 문제를 제시한다. 그런 다음 그는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간다.

 

달걀이 둥글다는 것은 애초에 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생물학적 원리가 담겨 있다. 이를 억지로 세우려는 것은 제국주의적 폭력의 논리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이런 제국주의적 논리는 오늘날 우리 현실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렇듯 하나의 현상에서 자연스럽게 다음 현상을 유추하는 방법은 독자가 이 글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면서 동의하도록 만드는 힘이 된다. 어떤 구성 방법을 사용하느냐는 글의 주제와 성격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다. 이 글의 참신함이 ‘뜻밖의 견해’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다음 문제의식으로 논리를 합리적으로 이어갔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전략>, 정희모 이재성, 초판 2005., 50쇄 2012., 도서출판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