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내기 의 가이드북
강사명: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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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책들로 차고 넘친다. 책은 글자로 채워지고, 글자는 내용을 담는다. 지식, 정보, 사상, 이념 심지어
상상까지. 그러므로 책을 읽는 것은 곧 글자에 담긴 뭔가를 더하는 일이다. 그런데 《노자(老子)》는 그것
을 죄다 쓸어버리라고 한다. 쓸어버려야 할 이유와 쓸어버리는 방법, 그리고 쓸어버린 뒤의 상태[경지]까
지 조목조목 논한다. 하여, 텅 빔의 극치에 이르기[致虛極] 야말로 《노자》가 추구하는 바이다. 《노자
》의 한 대목을 경청해 보자.
배우는 자[學者]는 날마다 더하지만, 도를 행하는자[爲道者]는 날마다 덜어낸다. 덜고 또 덜어내면 마침내 함이 없음[無爲]에 이르니,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다.(《老子》통행본 4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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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노자》는 뭔가를 채우는[益] 학습[學]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배운 것을 덜어내기[損]
위한 지침서이다. 《노자》는 그것을 도 닦기[爲道] 라고 말한다. 비유컨대, 《노자》는 컴퓨터의 소프트웨어삭제나 레지스트리정리 가이드북 같다. 처음 컴퓨터를 조립해 포맷조차 하기 전에, 정보의 수준에서 그것은 아직 무(無) 이자 혼돈 의 상태이다. 거기에 포맷을 하면 비로소 길이 놓이고, 운영체제와 프로그램들을 깔면서 유(有) 와 분별 의 세계가 드러난다. 그러나 계속 프로그램을 깔고 데이터들이 늘어날수록 마침내 컴퓨터는 버벅거리다 다운되기를 반복 할 것이다. 이때 프로그램 삭제 혹은 정리 소프트웨어가 필요하지만, 언젠가는 그로도 충분치 않은 때가 온다. 그러면 과감하게 하드디스크를 포맷하는 게 현명하다.
?컴퓨터를 이렇게 초기화할 수 있듯이, 우리 인간도 지식 분별 판단 욕심에 사로잡히기 이전의 순박한 상태로 초기화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초기화해야한다는 것이 《노자》를 관통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노자》가 없음[無] 과 텅 빔[虛] 그리고 덜어내기[損, 爲道] 를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우주론이나 존재론, 혹은 도에 관한 형이상학적 질문의 답변으로 읽을 수도 있다. 즉 세상의 본질은 뭔가 천지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등의 질문에 대한 답변 말이다. 하지만 《노자》의 사상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노자》는 중국 역사상 가장 극심한 혼란기인 이른바 춘추전국(春秋戰國) 에 출현했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끔찍한 시대상에 직면해 저마다 진단을 내리고 처방을 모색했다.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불린 많은 사상가들 이 출현했다. 《노자》는 특히 당시의 혼란을 문명의 위기 차원에서 파악했으며, 사람들이 가지고 아는 것이 모자라서 세상이 끔찍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아는 것을 덜어낼 줄 몰라서 세상이 끔찍해진다 고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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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갈래 길과 하나의 도
?그리하여《노자》는 완전한 비움을 말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사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활용되었다.《노자》해석과 활용의 다양성은 무엇보다 노자의 사상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노자》에서 대체 무엇을 노자의 사상 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노자》의 내용에 충실할수록, 그것을 뭐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것은 노자의 사상이 아닌 게 된다. 무엇보다 《노자》가 일관되게 구하는 것이 도(道) 인데, 그야말로 실은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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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혼돈을 이룬 상태가 있다. 그것은 천지보다 앞서 생겼다. 고요히 깊고 홀로 존재하여 한계가 없으며, 천하[만물]의 어미가 될 수 있다. 그 이름이 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도(道) 라는 자(字: 글자, 별명)로 른다. 나는 억지로 거기에 이름을 붙여 크다(大) 고한다.(《老子》통행본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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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통행본 《노자》제1장을 여는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참된[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恒)道] 라는 구절이 노자의 정신을 대표하게 된것이다. 이 구절이야말로 노자의 없음[無] 과 텅 빔[虛] 정신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들자면, 이런 무 와 허 는 마치 무제노트의 상태와 흡사하다. 무제(無題) 는 그것이 아무 것도 겨냥하지 않기에 제목을 붙일 수 없음 을 의미한다. 또한 특정한 용도가 정해지지 않아 모든 용도에 쓰이는 무제노트야말로 텅 비어 있으나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는 도의 작용을 연상시킨다.
《노자》는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하는 도(道)를 구한다. 특히 없음[無]과 텅 빔[虛]이 도의 본체[體]이고, 거기서 세상사의 온갖 작용[用]이 생겨난다고 본다. 이런 도의 작용은 정치 처세 사회 문화 예술 군사 등의 분야에 두루 미치지만, 그렇다고 작용이 본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또한 본체를 무시하고 작용만 얻을수도 없다. 예를 들어, 무제노트를 국어나 수학 공부에 활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국어노트나 수학노트로 지정하는 순간 무제노트는 더 이상 무제노트가 아닌게 된다. 마찬가지로 《노자》는 정치서다 처세서다 현학서다 라고 규정하거나 《노자》의 진정한 육성은 이것이다 라고 단언하는 순간, 그렇게 설명되는 《노자》역시 더 이상 본연의 《노자》가 아닌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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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잃은 현대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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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대사회가 기능과 효율만을 숭배해 사물의 근본을 제쳐놓고 말단과 지엽의 효용에만 눈을 돌리니, 끝내 도를 얻기 어렵다. 사람들이 도를 들으면 오히려 그것을 비웃는다. 쓸모가 없다고 말이다. 노자는 이런 사람들을 하사(下士) 로 불렀다. 정신 경지가 낮은 인사 라는 뜻이다. 노자의 말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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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경지의 인사[上士]가 도를 들으면 능히 그 핵심을 실행하고자 힘쓴다. 중간 경지의 인사[中士]가도를 들으면 들은 듯 만 듯 여긴다. 낮은 경지의 인사[下士]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만약 (下士가) 크게 비웃지 않는다면, 도라고 하기에 부족하다.(《老子》통행본 4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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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처럼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꽃이 좋고 열매가 많이 열린다. 그러니 나무의 밑동을 잘라내고 좋은 꽃과 풍성한 열매를 보려는 게 가당치 않음을 모르는 사람
은 없다. 그러나 막상현실에서는 꽃과 열매만 구하고, 밑동과 뿌리는 쓸모없다고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게 사
나운 세상의 어리석은 인심이다. 하여 세상은 꽃과 열매가 부족해 끔찍한 게 아니라, 근본을 버리고 꽃과 열매만쫓기 때문에 끔찍해진다. 그것은 탐욕스러울 뿐더러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인간에게는 자연이라는 뿌리가 있고, 모든 실용 지식에는 기초학문의 뿌리가 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뿌리를 뽑아버리는 엄혹한 시대에, 또 다시 문명 스스로 문명의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자연의 결실을 독점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자연의 조화를 깨뜨렸으며, 생태계의 평형을 파괴했다. 그것은 결국 인간 자신에게 재앙으로 돌아오고 있다. 실용지식만을 추구하는 국가[정부]의 천박한 교육정책이 지식의 조화를 깨뜨리고, 지식생태계의 평형을 파괴했다. 대학의 자존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그것은 결국 고등교육의 붕괴와 지성의 황폐화로 되돌아올 것이다. 이렇게 현대인은 지금 자기존립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기반 을 자기 스스로 파멸시키고 있다.
?오늘날 물질문명의 일방적 전개는,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게 심각한 위협이다. 생태계의 위기 말고도, 사회적 불평등의 위기, 도덕의 위기, 사회 심리적 위기 등 문명소외에서 비롯된 증후들이 다방면에서 깊어진다. 이런 문명소외의 심각성은 노자가 살던 시대보다 지나치면 지나쳤지 모자라지 않다. 따라서 현대문명의 소외를 극복하는 것은, 전 지구적으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급박한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지혜는 아직 충분치 않고 경험 또한 일천하다. 여기서 《노자》는 매우 풍부하고 귀중한 유산과 교훈을 준다. 《노자》는 이미 중국을 넘어 인류공동의 정신적 자산이 되었으며, 그 가치는 실로 존귀하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다시 《노자》를 읽고 새로운 길을 묻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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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교수 (군산대 철학과)
<필자소개>
– 고려대학교 철학과 졸업.
– 중국 북경대학(北京大學) 대학원 철학과 철학석
사, 철학박사.
– 현 군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 저서: 중국철학의 이단자들 , 자료와 해설 한국
의 철학사상 , 회남자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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