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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제안을 서두르지 않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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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과통합센터2014-06-02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제안을 서두르지 않는다.
▲ 배경 설명에서 시작하라.
전국시대 사람 소진은 동주(東周)의 낙양 출신이다. 당대 최고의 스승인 귀곡선생을 찾아 제나라까지 찾아가서 배웠으나 취직에 실패하고 가족에게까지 비웃음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외국유학을 했지만 백수 신세가 된 것. 지금까지 공부한 것이 소용이 없음을 한탄한 소진은 병서(兵書)인 음부(陰符)를 독파하기로 한다. ‘너무 많이 아는 것은 한 가지를 제대로 아는 것 보다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 두문분출한지 1년 후, 소진은 드디어 상대의 마음을 알아내어 설득하는 법을 터득한다.
자신감이 생긴 소진은 신흥 강국으로 떠 오른 진나라 왕에게 갔다. 그러나 때마침 진나라에서는 가혹한 변법으로 인심을 잃은 상앙을 죽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외국인 유세객을 꺼려하는 분위기. 소진은 다시 취직에 실패한다. 다음에 찾아간 조나라에서도 소진은 유세에 실패했으나 낙심하지 않고 연나라로 갔다. 연나라 문후(文候) 앞에서 유세를 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다. “연나라는 동쪽으로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으로는 호타하와 역수가 있습니다.” 소진은 연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설명한다. 객관적 정보에 기초한 배경설명은 상대에게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한다. 물론 소진이 이러한 정보를 소상히 알게 된 것은 1년간 연나라에 머물며 파악한 결과다.
▲ 천 리 밖의 근심을 버리고 백 리 안의 근심을 해결하라.
소진은 이어서 말한다. “(연나라) 땅은 사방 2천여 리이고, 무장한 병사는 수십만이며(…) 몇 년은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습니다.” 소진은 연나라의 대외적 배경 설명에 이어서 대내적 환경을 분석한다. 객관적 분석으로 상대의 신뢰를 얻은 후, 본격적인 주장을 전개하기 위한 근거를 제시 한 것. “진나라가 연나라를 치려면 운중과 구원을 넘고 대와 상곡을 지나야 하는데, 그 길은 수천 리에 이릅니다. (…) 반면 (이웃한) 조나라가 연나라를 친다면 열흘도 안 되어 수십만의 군사가 동원에 진을 칠 것입니다.” 진나라와 조나라의 위치와 군사력을 비교하며 예상되는 결과를 제시하는 소진의 말에 연나라왕은 설득되고 만다.
소진이 서두에 연나라의 풍요를 늘어놓은 이유는 첫째 왕을 칭찬하여 호감을 얻기 위함이며, 둘째 자신의 합종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이러한 것들을 모두 잃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하기 위함이다. 이후 조나라를 다시 찾은 소진은 연나라 왕을 설득했던 방법으로 조나라 왕에게 합종책을 받아들이게 한다. 이렇게 위, 한, 제, 초의 제후들을 차례로 설득하여 결국 소진은 6국의 승상이 된다. 그가 고향을 지날 적에는 주나라 천자도 영접할 정도로 위세가 컸으며 괄시하던 가족들은 그를 감히 바로 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소진은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설득할 수 있는 전문가였다. 조나라에서의 첫 번째 유세에 실패했던 소진이 두 번째 시도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에는 ‘사회적 증거의 법칙’이 작용했다. 그리고 연이어 제후들을 설득하는데 수월했던 것도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따라가려는 ‘유사성의 원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편 진나라의 군대를 15년 동안이나 함곡관 밖으로 못 나오게 한 소진의 합종책은 귀곡선생에게 동문수학했던 장의의 연횡책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이것도 유사성의 원리일까?
박태건 (글쓰기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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