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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사과의 조건
79. 사과의 조건
비교과통합센터2014-06-02

 

 사과의 조건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서 다투는 연인을 보았습니다. 굳은 표정과 팔짱 낀 모습, 옆을 지나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태풍의 눈’ 사이를 통과했을까요? 남자가 말합니다. ‘미안해…….’ 한일자로 굳게 닫혀 있던 여자의 입이 짧게 열립니다. ‘뭐가?’, ‘내가 ……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분수에서 솟구친 물방울이 바람에 날립니다. 제가 건물 모퉁이를 돌아 갈 때까지 그들은 미동이 없습니다. 남자의 사과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남자들의 사과는 왜 자주 실패할까요? 그들에겐 사과가 굴욕 혹은 복종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과 표현은 언어 심리학자들에게 오랜 연구 대상이었죠. 사과 연구자들은(생물학자들이 절대 아님!) 사과의 속성을 ‘왜’에서 ‘어떻게’로 가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왜’는 사과의 목적을, ‘어떻게’는 사과의 진정성을 의미합니다. 사과에 서투른 분들은 다음 네 가지를 기억하세요.

 먼저 감정을 표현하세요. ‘미안해’, ‘죄송합니다’와 같은 말은 사과의 시작입니다. 많은 경우 ‘그런데’, ‘하지만’과 같은 변명을 덧붙이곤 합니다. 변명은 절대 금물입니다. 더구나 변명과 함께 상대의 잘못을 상기시켜 ‘물 타기’를 시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전쟁 선포’와 같습니다.

 둘째, 자신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언급해야 합니다. ‘무엇이 미안한지’ 표현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책임을 인정해야 수습도 가능합니다. ‘그냥 다, 잘못했어…’ 따위의 답변은 사그라지는 불씨를 깨웁니다. 사건에 대한 유감 표명을 구체적으로 한다는 것은 발생한 책임도 인정한다는 뜻이니까요.

 

 셋째, 사과에는 치유와 보상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너의 화난 마음을 풀어 줄 수 있을까?’라든지, ‘미안해 앞으로 약속시간에 늦지 않도록 노력해 볼게’ 등.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약속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어설픈 보상을 대가로 제시한다면 사건을 무마하는데 급급하다는 인상을 주게 됩니다. 보상의 제시는 사과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니까요.

 

 넷째, 쉽진 않지만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두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주도권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상대가 용서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이 실패한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뇌과학자 정재승은 진화론의 관점에서 사과를 이야기합니다. 인류는 발각되지 않는다면 은폐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라고 학습됐다는 것이죠. 보수적인 집단일수록 ‘부인 전략’을 더 많이 씁니다. 조지 부시 시절에는 기밀문서가 2,000만 건인데 비해 클린턴 시절에 360만 건에 그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지면서 진실은 더 빨리, 광범위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가 높을수록,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결국 최고의 수습은 사과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길버트 체스터톤은 “거만한 사과란 모욕이나 다름없다”고 했습니다. 사과는 당사자가 자신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진심으로 뉘우치며 향후 의미있는 조치를 약속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제대로 사과하고 계신가요?

▲ 참조: 김호·정재승, 『쿨하게 사과하라』, 어크로스, 2011.

박태건 (글쓰기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