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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거칠은?/거치른?/거친?
93.거칠은?/거치른?/거친?
비교과통합센터2014-12-23

 

거칠은?/거치른?/거친?

 

 

(1)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나뭇잎,/그렇게 주고 받는/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이 커다란 세계를/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믿게 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특이한 서울 사투리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1)은 정한모 시인의 ‘가을에’라는 시의 첫 부분이다. 시를 잘 모르지만 ‘가을에’라는 시는 좋아한다. 사실은 내용도 좋지만 표현도 좋다. 필자는 ‘나뭇잎이라는 놈이 햇빛으로 물들면서 가을을 날고 있다’는 표현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필자처럼 무미건조한 사람은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표현이다.

1행의 ‘물들으며’나 2행의 ‘날으고’에 대해서 흔히들 운율을 고르기 위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시적 허용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운율을 고르기 위해 넣은 ‘으’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정한모 시인의 어투가 그대로 시에 묻어난 것일 수도 있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보면 점순이가 주인공에게 감자를 내밀면서 ‘느 집에 이거 읎지’라고 한다. 사투리를 맞춤법에 맞게 쓴 것이다.

사실은 ‘물들으며’와 ‘날으고’는 서울을 포함한 중부 지방의 전형적인 사투리 가운데 하나이다. 이와 관련된 서울 사투리는 의외로 많이 발화된다.

 

(2) 피리를 불은 적이 없다. 피리를 그렇게 불으면 안 되지.

줄으면 줄은 대로 적자. 가진 돈이 자꾸 줄으니까.

 

‘불-’, ‘줄-’에서의 표기상 공통점은 받침 ‘ㄹ’이다. ‘가을에’에서의 ‘물들-’, ‘날-’ 또한 ‘ㄹ’로 끝난다. ‘ㄹ’ 받침을 가진 동사는 사실 (3가)와 같은 형태로 실현된다. ‘ㄹ’은 일반적으로 자음이라고 알고 있는데 아래를 보면 받침이 없는 ‘싸-’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으’가 확인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이다. 반면 받침으로 ‘ㄱ’을 가지고 있는 ‘썩-’은 ‘썩으면’, ‘썩으니까’처럼 ‘으’가 확인된다.

 

(3) 가. 쓸면, 쓰니까, 쓴 사람, 쓸고, 쓸어도

나. 싸면, 싸니까, 싼 사람, 싸고, 싸도

다. 썩으면, 썩으니까, 썩은 것, 썩고, 썩어도

 

모음(‘ㅏ’)과 ‘ㄹ’이 같은 부류로 묶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화자들은 ‘ㄹ, 이 놈이 왜 모음과 같은 부류지’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래서 자음 편을 들다 보면 ‘썩으면’에서와 같이 ‘으’가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물들으며’, ‘불은 사람’, ‘줄으니까’ 등과 같은 표현이 가능해진다. 한국의 중앙에서 어엿하게 확인되는 명백한 사투리이다. 일상생활에서는 그대로 사용하되 국어 시험을 볼 때만 표준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된다.

특이한 것은 ‘날으고’이다. ‘-며’, ‘-니까’ 등과 같이 소위 ‘으’가 확인된다. 지면 관계상 자세한 설명은 어렵지만 ‘날으고/나르고’로 되면서 심지어 ‘날라 간다’와 같은 특이한 형태로 발전하는 놈이 ‘날-’이다. ‘(물건을) 나르고’, ‘물건을 날라’ // ‘빠르고’, ‘빨라’ 부류에 유추된 특별한 사투리이다.

 

(4) 거치른 벌판으로 달려가자. 젊음의 태양을 마시자. 보석보다 찬란한 ……

 

(4)는 김수철의 ‘젊은 그대’라는 유명한 노래의 첫 부분이다. 사실은 ‘거칠+ㄴ’이 결합하면 ‘거친’이 되어야 한다. ‘거칠+은’이 ‘거치른’으로 된 것이다. ‘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임석규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