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에드거 앨런 포.
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거장이자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독자들이 사랑하는 작가입니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들이 흔히 그렇듯 포는 살아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한 채 불행하게 삶을 마감했지요.
열네 살 때 처음 시를 쓸 만큼 일찌감치 글쓰기를 자신의 소명으로 깨닫고
작가로 성공하기 위해 열악한 현실과 싸우며 고군분투했던 포는,
마흔 살의 나이로 수수께끼의 죽음을 맞기 전까지 20여 년을 작가로 살며 네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장편소설,
무려 60편이 넘는 단편, 그 외 잡지 편집자로서 많은 논평과 에세이를 썼습니다.
그래서인지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글쓰기로만 생계를 유지한 최초의 미국 작가가 되었지요.
당대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미국 문학의 개척자’ ‘추리소설의 창시자’, ‘공포소설의 완성자’,
‘풍자소설의 대가’, ‘SF소설의 선구자’, ‘새로운 문학이론의 정초자’ 등 다양한 수식어가 포에게 헌정되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알 수 없는 명상에 빠진 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간다.” _<병 속의 수기>, 에드거 앨런 포/ 일러스트 해리 클라크
후대 작가들은 포가 남긴 방대한 문학적 유산을 누리며 그에게 무한한 존경을 표했는데요,
대표적으로 ‘셜록 홈스’의 아서 코넌 도일(포의 은둔형 천재 탐정 ‘뒤팽’에 대한 오마주로 탄생),
SF소설의 대가 쥘 베른(직접 포의 모험소설 후속편을 쓰기도),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 에도가와 란포(아예 필명을 포의 이름에서 따옴) 등의 대가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포의 단편들은 특히 19세기 유명 삽화가들의 사랑을 받아 많은 이들이 포의 작품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오늘은 그 가운데 독특한 화풍으로 사랑받는 아일랜드의 삽화가 해리 클라크(Harry Clarke, 1889~1931)의 일러스트와 함께 포의 명단편들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검은 고양이>
“이제부터 쓰려는, 완전히 미친 소리 같지만 가정사에 불과한 이야기에 대해
나는 사람들이 믿어줄 것이라는 기대도, 믿어달라는 호소도 하지 않는다.
내 감각들조차 증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인데, 정말로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기대를 할 수 있겠나.
그렇지만 난 미친 것도 아니고 망상에 빠진 것도 절대 아니다.
하지만 내일이면 나는 죽을 테고, 그러니 오늘 영혼의 짐을 덜고 싶다.”
<검은 고양이>는 사실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지요.
한 남자가 알 수 없는 광기에 이끌려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를 죽이고 끔찍한 환영과 공포에 시달리다 파국을 맞는 이야기로,
분량은 짧지만 오래도록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시내 단골 술집에서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온 어느 날 밤, 녀석이 나를 슬금슬금 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놈을 덥석 낚아채자 과격한 행동에 깜짝 놀란 녀석이 이빨로 내 손을 살짝 물어버렸다.
순간, 악마와도 같은 분노가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 진짜 영혼은 순식간에 몸에서 달아나버리고 술이 키운 잔인무도한 악의가 온몸의 세포를 뒤흔드는 것 같았다.
나는 조끼 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 연 다음 그 가엾은 짐승의 목을 움켜잡고 한쪽 눈알을 눈구멍에서 유유히 도려냈다!”
동물을 사랑하던 유순한 성격의 주인공은 “음주라는 악마”로 인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난폭하게 변하가다
결국 고양이의 “한쪽 눈알”을 도려내고 마는데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더욱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며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읽을 때마다 소름이 돋는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그때 내 생각이 어땠는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나는 정신이 아득해진 채 반대쪽 벽으로 휘청휘청 뒷걸음쳤다.
계단 위의 경찰들은 일순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열두 개의 강인한 팔들이 벽에 달려들었다. 벽은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이미 상당히 부패하고 피떡이 된 시체가 관중의 눈앞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 머리 위에 그놈, 간교하게 나를 꼬여 살인을 저지르게 만들고 그 목소리로 나를 고발해 교수대로 인도한
그 끔찍한 짐승이 시뻘건 입을 쩍 벌린 채 외눈을 이글거리며 앉아 있었다. 내가 그 괴물을 벽에 묻어버렸던 것이다!”
“내가 그 괴물을 벽에 묻어버렸던 것이다!” <검은 고양이>
<\<윌리엄 윌슨>
“일단 내 이름은 윌리엄 윌슨이라고 해두자. 내 진짜 이름으로 앞에 놓인 이 깨끗한 종이를 더럽힐 필요는 없으니까.”
<윌리엄 윌슨>은 <검은 고양이>만큼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이중 자아’를 소재로 한 매우 멋진 소설입니다.
윌리엄 윌슨이라는 청년이 자신과 꼭 닮은 또 다른 윌리엄 윌슨으로 인해 비극을 맞는 내용인데요,
‘다중인격’이나 ‘도플갱어’ 같은 소재는 현대 장르문화 속에서 익숙한 단골 소재입니다만
(조인성 공효진 주연의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조인성이 연기한 소재이기도 하지요),
이미 200년 전 포는 이 짧은 단편 속에서 ‘이중자아’에 관한 강렬한 이야기를 멋지게 완성해놓았습니다.
“윌슨이 택한 방법은 내 말과 행동을 완벽하게 흉내 내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연기였다.
옷차림을 따라 하는 거야 쉬운 일이었다. 걸음걸이와 전반적인 태도도 어렵지 않게 훔쳐 갔다.
체질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까지 놓치지 않았다. 물론 커다란 목소리야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어조는 완전히 똑같았다.
녀석의 독특한 속삭임은 고스란히 내 목소리의 메아리가 되었다.”
학교에 입학한 윌리엄 윌슨은 자신과 똑같은 이름에 외모도 똑 닮고 생일까지 같은 동급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흔해 빠진 자신이 이름이 싫어서 그 이름을 들으면 “귀에 독약이라도 퍼붓는 것” 같던 주인공은 이 친구가 결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특히 자신이 ‘나쁜 짓’을 할 때마다 사사건건 제지하고 훼방을 놓으니 서서히 이 친구를 증오하게 되지요.
주인공은 이 친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지만, 어디를 가든 윌리엄 윌슨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주인공은 그와 결투를 벌이고 마는데요.
“하지만 녀석은 더 이상 속삭이며 말하지 않았다. 녀석이 말하고 있는데 마치 내가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네가 이기고 내가 졌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너 또한 죽은 거나 다름없어. 세상을, 천국을, 희망을 다 잃었으니까! 너는 내 안에서 존재했어. 나의 죽음을, 너와 똑같은 이 모습을 보면서 네가 얼마나 철저히 자기 자신을 죽여버렸는지를 잘 봐.””
흥미로운 사실 하나. 극 중 윌리엄 윌슨의 생일인 1월 19일은 실제로 포가 태어난 날이기도 합니다.
“나의 죽음을, 너와 똑같은 이 모습을 보면서 네가 얼마나 철저히 자기 자신을 죽여버렸는지를 잘 봐.” <윌리엄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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