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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우리의 문장(文章)은 아직 미생(未生)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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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과통합센터2014-12-23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우리의 문장(文章)은 아직 미생(未生)이다.
지난 주말에 ‘후마니타스 독서·논술’ 심사를 했다. 밤늦게 피곤한 눈을 비비며 읽은 시험지엔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는 글‘과 ’자기 주장만 앞세우는 글‘이 많았다. 글을 읽을수록 일주일간의 피로가 쓰나미로 밀려왔다. 균형 잡힌 시선을 가진 글을 찾기 어려웠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나를 버티게 해준 건 다량의 카페인과 당분이다.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 잠에 덜 깬 아이를 앞세워 동네 목욕탕에 갔다. 뜨거운 탕 안에 들어가니 신음소리가 절로 났다. 몸을 개운하게 밀기 위해선 때를 좀 더 불려놓아야지. 글을 쓸 때도 이런저런 생각을 미리 불려(?)야 한다. 탕 안에 앉아 사색을 하듯 마인드 맵을 해보는 것도 한 방법. 떠오르는 생각과 생각을 연결하여 문장을 만든다. 그리고 그 문장에 붙은 때를 북북 지운다. 반복되는 단어들이 모두 때다. 구석구석 삭제하자. 접속사도 삭제할 수 있으면 깨끗이 ‘밀어라’. 방금 목욕탕에서 나온 피부처럼 문장을 매끈하게 다듬어야 한다. 신이 인간에게 등을 만들어 준 것은 겸손함을 알리려는 뜻일까? 냉탕에서 신나게 노는 아이를 불러 등을 밀라고 하니 몇 번 밀고는 다 했단다. 꼼꼼히 해달라고 주문하자 투덜거리면서 다시 밀어준다. 흡족치는 않지만 그래도 혼자 하는 것보단 낫다. 글을 퇴고할 때도 마찬가지. 주위의 사람들에게 내 글의 등을 밀어달라고 하자. 어린아이도 좋다. 어색한 부분이 어디인지 물어봐야 한다. 때를 밀기 위해 등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위대한 글들의 제 1독자는 배우자이거나 때론 청소부였다. ‘이태리타월’로 중복되는 단어와 조사를 ‘북북’ 밀어달라고 부탁하자. 온몸이 빨개지도록 때를 밀고 나니 배가 고파졌다. 탈의실에서 파는 구운 계란을 먹고 싶은데 체중계에 올라갈 것이 걱정이다. 저울은 거짓이 없는 법. 평상시 욕심을 줄여야 몸이 가벼워지듯 날씬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선 핵심만 남기고 삭제하자. 문장의 핵심은 곧 뼈대다. 문장을 줄이면 전달하려는 뜻이 명쾌해진다. 같이 논술 심사를 했던 S는 두달만에 20㎏ 감량에 성공했다며 자랑했다. 그러나 다이어트를 하기엔 나는 의지가 너무 약하다. 저녁이면 어찌나 입맛이 도는지 밥만 잘 먹는다. 몽테뉴는 ‘싫증나는 문장보다 배고픈 문장을 쓰라’고 했다. 그런데 다이어트를 번번이 실패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운동을 해도 꼭 배고플 정도에서 멈춘다. 글을 줄이는 것은 축 늘어진 뱃살을 단단하게 조이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체중감량을 할 때 ‘어떻게 찌운 살인데…’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글을 줄일 때도 과감해야 한다. 그런데 줄여도 줄여지지 않는 내 뱃살은 어쩌지? 살짝 숨겨놓아야겠다! 선풍기 앞에 서서 몸을 말리니 한결 가뿐해진다. 문장을 바꾸는 것도 그렇다. 불필요한 조사와 반복된 구절을 삭제해도 개운치 않다면 가을나무가 단풍으로 갈아입듯 적절한 단어로 확 바꿔보자. 우리의 글은 아직 미생(未生)이다. 포기하지 말자. 마지막 바둑돌을 놓는 순간 바둑이 끝나듯 글도 마침표에서 끝난다. 끊임없이 지우고, 줄이고, 바꾸자. 어쩌면 우리는 저마다의 바둑을 두느라 세월이 가는 지도 모르고 산다. 남은 시간을 지난 시간처럼 살지 않으려면 바꾸자. 문장을 바꿔야 삶이 달라진다. 목욕탕에서의 사색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덩치 큰 사람이 냉탕으로 다이빙을 한다. 문득, 아르키메데스의 발견처럼 내 안에서 뭔가가 와락 넘쳤으면….
박태건 (글쓰기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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