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고전강좌 다시보기
90.안개 속에서 길을 묻다 | |
---|---|
비교과통합센터2014-12-23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안개 속에서 길을 묻다
아침 저녁으로 캠퍼스엔 안개가 낀다. 안개는 겨울이 다가오는 걸 알리는 이 도시의 전령사다. 학교 운동장 트랙을 도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워졌다가 나타나는 것을 연구실 창문 밖으로 본다. 커피 물이 다 끓기도 전이다. 안개 속에서는 누구나 경계심을 갖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안개가 걷히길 기다리며 자신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이번 후마니타스 독서토론대회(이하 대회)의 심사도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았다. 토론의 쟁점을 잃고 헤매거나, 자기 주장만 앞세우는 참가자들이 무대 위에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인문학은 하나의 문제에 여러 개의 답이 있음을 인정하고 배우는 학문이다. 올해 기업 채용의 ‘핫이슈’가 인문학인 것도 이런 이유일 터. 지금까지 정답만을 외웠던 이들은 토론을 통해 ‘차이’를 배우고, 경합을 통해 길을 찾는다. 안개 속에서 마주 오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일이 바로 토론이다. 이번 토론대회를 지켜보며 다음 세 가지가 아쉬웠다. 첫째는 ‘토론 규칙과 예절’에 대한 참가자의 이해 부족이다. 상대의 돌발적인 질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을 보기 위한 <확인조사>에서 다른 사람이 답변하는 경우가 있었다. 규칙의 숙지는 필수적인 이해사항이다. 전투가 벌어질 지형을 사전에 숙지하지 않고서 어떻게 자신의 전술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있단 말인가. 둘째는 논리적 전달 능력의 부족이다. ‘주장-이유-근거’로 이어지는 논리구조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해야 한다. 그런데 답변이 단답식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평소에 논리적 사고와 표현훈련이 부족한 결과다. 글쓰기센터에서는 다양한 의사소통 특강을 연중 진행한다. 또한 개인별 첨삭지도를 통해 수준별 표현능력 개발을 도와준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교육이 무료라는 점이다. 셋째는 독서토론의 기본을 지켜야 한다는 것. 독서토론은 책에 대한 이해력과 분석력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토론시에는 지정도서의 주제와 관련하여 적절한 논제를 제시했는지, 저서의 내용에 기초해 팀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옹호 혹은 반론했는지가 평가의 요건이 된다. 지정도서의 언급 없이 개별 사례만 근거로 들이댄다면 독서 토론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경청(傾聽)의 자세도 토론자가 익혀야 할 습관이다. 경청은 상대를 인정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한 토론의 전제다. 토론과정을 거치며 잘못된 의견과 실행 방법은 사실과 논의에 의해 점진적으로 굴복되거나 타당한 주장을 받아들이며 조정되어야 한다. 이것을 밀은 ‘다른 의견과의 합의를 통해 현인의 지혜가 완성된다.’고 했다. ‘과정으로서의 결과 도출’이 토론대회의 목적인 것이다. 토론대회를 마치며, 최약체로 생각되었던 팀이 토론을 거듭하면서 눈부시게 성장한 것 기억에 남는다.(이 팀은 대진운이 너~무 좋았다.) 그 팀의 마지막 게임에서 서로의 경험들이 해석되고 조정되는 아름다운 순간에 나는 심사석에 벌떡(?) 일어날 뻔 했다. 이렇게 우리를 둘러싼 무지의 안개도 서서히 걷히리라. 올해는 ‘인문학’ 때문에 취업 준비생들이 힘들었다고 한다. 인문계 출신은 배제되었고 이공계 출신에게는 어려운 인문학적 역량을 요구했다고. 안개가 자욱한 운동장 트랙을 돌던 사람은 여전하다. 그는 안개 속에서 자신의 길을 물으며 걷는지도 모른다. 그를 불러서 뜨거운 커피를 같이 마시고 싶어졌다.
박태건 (글쓰기센터 연구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