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3이나 고1 무렵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 같은데,
그 동기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때 저로서는
누군가에게 무슨 얘기인가를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춘기였으니까
저 나름대로 세상살이에 대해서 궁금한 점, 의심나는 점 들이 자꾸 생기면서,
이럴 때 남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궁금해져서 시를 읽기 시작했겠지요.
시를 읽다 보니까 ‘이 말도 참 근사하지만 나는 나대로 조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나는 나대로 할 얘기가 있다.’ 생각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읽은 시 중에서 기억나는 것은 김영랑 시인의 「언덕에 바로 누워」입니다.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이였데 감기였데.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중3 때 읽고서 무척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시를 읽고서 나도 뭔가 먼 데 있는 것, 먼 데 있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말하자면
제 가슴 속에 뭔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이 시를 읽고서
나도 할 말이 한 마디 있다는 생각으로, 시를 처음 써 본 것이
첫 경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결국 시라는 것은 자기가 남한테 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아주 뒷날의 일이지만,
시는 얘기이되 남한테 명확하고 힘있게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시인은 명확하고 힘있게 말하는 사람
영국의 계관시인 워드워즈가 친구인 코울리지와 함께 서정시집을 냈습니다.
18세기 초에 나온 초판에서는 이런 말을 안했고, 재판을 내면서
그 서문(序文)에서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시란 결국 남에게 하는 얘기다.
다만 남에게 명확하고 힘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시인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하고 보통 사람하고 다른 점이라면, 보통 사람은 남에게 명확하고
힘있게 얘기할 수 없지만, 시인은 명확하고 힘있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명확하다’는 말에는
‘간단하고 짧게’라는 뉘앙스가 깃들어 있습니다.
또 ‘힘있게’라는 말에는 감동을 준다는 뉘앙스가 들어 있죠.
분명하고 짧게, 그렇지만 남한테 힘있고 감동적으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시인이고
그 결집체가 곧 시라는 말이 되겠는데, 제가 처음에 시를 쓰기 시작한 때를 생각해 봐도
이 말은 맞는 것 같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얘기를 듣고 싶어서 시를 읽기 시작했고,
또 힘있고 명확하게 하는 얘기를 좋아했습니다.
제가 시를 쓰기 시작할 무렵은 워드워즈를 읽기 전이었지만,
막연하게나마 남에게 명확하고 힘있게 얘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젊을 때 시를 쓰고 늙으면 시를 못 쓴다는 말은 워드워즈 때문에 생겼습니다.
워드워즈는 젊을 때에는 굉장히 좋은 시를 쓴 그는 산업혁명기에
시의 언어를 새롭게 발견한 시인이었습니다. 이른바 ‘민중 언어’를 발견한 사람이지요.
그 이전에는 모두 문어(文語) 즉, 상류층에서만 쓰는 어려운 말로 시를 썼는데
워드워즈부터 비로소 평민들이 쓰는 구어(口語)로 시가 씌어지기 시작했으므로
세계시사에서 아주 혁명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시력(詩歷)에는 문제가 좀 있습니다.
젊은날에는 근사한 시를 쓰고 생각도 진보적이었는데, 나이가 들어
집안의 유산을 챙기고 나서는 생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젊었을 때 쓴 시는
민중 언어로써 참 훌륭하게 씌어진 것들이 적지 않은데,
나이 들어서 쓴 시들은 이른바 쓰레기가 된 것이 많습니다.
이를 두고 가리켜서 로버트 브라우닝 같은 사람은
“워드워즈는 39세까지만 살다가 죽었어야 할 사람”이라고 혹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년은 봄/봄은 아침/아침은 7시/하늘엔 종달새가 날고
‘(The year’s at the spring,/And day’s at the morn;/Morning’s
at seven;/The hill-side’s dew-pearl’d;/The lark’s on the wing;/the
snail’s on the thorn;/God’s in His heaven–/All’s right with the world!) 하는
「비파의 노래(Pippa’s Song)」라는 시를 쓴 사람이지요. 그는 자기 시보다도 워드워즈를 욕해서 더 유명해질 정도였습니다.
‘워드워즈는 30세까지만 살았어야 된다. 괜히 팔십 넘게 살아서
시인 모두를 망신시켰다’고 하였는데, 그 사람 때문에 나온 소리입니다.
사실 외국에는 나이 들어서도 좋은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 나라에도 워드워즈를 닮은 시인들이 적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저는 이렇듯 처음에는 남과 대화한다는 생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도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분명하고 힘있게 들려 주는 시들이었습니다.
그 때 좋아했던 시 인 가운데 하나가 해방 후 월북을 해서 한동안 잊혀졌던 이용악입니다. 그의 시를 읽었다는 이유로 잡혀가서 몇 달씩 고생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만
지금은 읽어도 아무 일 없습니다. 민주화가 된 덕분에 다시 우리 문학사 속에서
복권된 아주 훌륭한 시인이지요. 제가 어릴 때 좋아했던 시 중에
그의 「북쪽」이 있습니다.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 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르다
제가 이것을 읽은 것은 고등학교 2, 3학년 무렵이었습니다.
읽으면서 가슴 속으로 찡하는 울림 같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 때는 이용악 시인이 월북을 했는지조차 전혀 몰랐습니다.
다만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그분의 시집을 구해,
시집 맨 앞에 실려 있던 이 시를 읽고서
큰 감동을 받았지요. 이걸 읽으면서 저는 우리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여인이 팔려가고, 외국한테도 쩔쩔매고, 가난하게 살고….
이런 것을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된 바로 이용악의 「북쪽」이었습니다.
얼마 뒤 대학교 2학년이 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갈대」라는 시로
「문학예술」지의 추천을 받아서입니다. 제가 문단에 나와서
굉장히 실망한 것이 있었습니다. 선배나 동료 시인들을 만나서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모두들 당대의 시만 읽을 뿐 10년이나 15년 전의 시조차 잘 읽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문예지에 발표되어 여러 평론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들만 읽고서, 마치
그것이 문학의 전부인 것처럼 얘기를 해요.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좋은 선생님을 한 분 만났습니다.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수업 시간에 제가 이용악 시인에 대해서 묻곤 할 때마다,
당시에는 그것이 금기시될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이용악 시인에 대해서 자세한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러이러한 시도 있으니까 그것들도 한번 읽어 보라고 권해 주셨습니다.
그 덕에 저는 좋은 시들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읽을 수 없는 시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지금 연세대 교수이자 문학 평론가인 유종호 씨의 아버지인데,
저는 그런 면에서 참 행운아였지요. 그런데 서울에 와서 동료 문인들이나 선배들을 만나 이용악 얘기를 하면, 그 사람은
벌써 옛날 시인이고 지금은 그 사람의 시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석의 시도 좋아했는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소설도 마찬가지로,
홍명희의 「임꺽정」 얘기를 하면 아무도 귀기울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저하고 술자리에서 얘기가 유일하게 통할 수 있는 사이가
작고한 천상병과 유종호였습니다. 저하고 천상병과는 여섯 살쯤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천상병이 저를 어린애 취급을 하고 상대를 잘 안해 주려고 하다가,
내가 현덕의 소설을 읽었다는 소리를 하니까 그제서야 이 사람이
술을 먹다가 깜짝 놀라 바라보았습니다. “야! 임마 니가 어떻게 현덕을 읽었어?” 하는
천상병의 말에, 저는 “내가 왜 못 읽어!” 하면서 현덕의 소설 한 대목을 암송해 주었지요.
그랬더니 “진짜로구나!” 하면서 백석 시 이야기로 번지고 하면서 친해졌지요.
인사동에 나오면 르네상스 다방을 찾아 천상병을 만났던 기억이 납니다.
천상병은 원래 돈이 없는 사람이니까 술 얻어먹을 희망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제가 그를 찾아가는 것은 옛날 소설을 읽은 동지로서
유일하게 인정해줬기 때문입니다. 한때 문학을 포기할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 때 실망한 것과 관계가 있는 거지요. 시를 쓸 마음도 안 생기고,
동료나 선배 문인들을 만나면 아무 재미가 없었습니
1956년이면 한국전쟁이 끝난 지 겨우 3년밖에 안 되었을 때입니다.
길거리에 팔다리 없는 상이군인이 허다하고, 버스를 타면 옆에 와서 껌 사달라고
생떼쓰는 상이군인들 때문에 불편할 정도였지요. 그냥은 못 갔습니다. 수없이 사줘야 되고,
돈 없으면 욕도 먹어야 했고, 거리마다 무너진 집, 폭탄 맞아서 쓰러진 집 들이
복구되지 못한 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 당시에
시인들이 쓰는 시라는 것은 신이 어떠니,
까뮈가 어떠니 사르트르가 어떠니 하는 관념적인 소리뿐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면 옛날식으로 꽃이 어떻고 님이 어떻고
고향이 어떻고 하는 타령들뿐이었습니다. 저는 자연히 시를 쓰는 데 흥미를 잃었지만 그것 때문에
문학을 그만두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만나는 친구들 중에 우연히 사회과학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수요회 같은 것을 만들어 가지고 수요일마다 모여서 술도 먹고 했는데,
그런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제가 어떻게 보면 세상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날 만나면 일주일 동안 읽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일주일 동안 무엇에 대해서 읽었는지 한 마디 제대로 못하면
병신이 되니까 얘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헌책방 찾아다니면서 책을 한 권씩 구해 읽었습니다.
남들이 거의 안 읽었을 책을 구해 읽은 다음 모임에 나가 감동적으로 발표를 하면,
그날의 대장이 됩니다. 돈을 추렴해서 술값을 내는데,
그 사람은 술값을 안 내도 됩니다. 3차 4차를 가도 그냥 먹는 거지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다가
영문판 「공산당 선언」을 구했습니다.
그것 참 신기하대요. 그 책 자체가 신기한데다가 그런 것이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처음 읽어 보는 거였으니까요. 그래서 이틀밤을 새워서 앞에서 4페이지나 5페이지 정도를
사전을 다 찾아가면서 열심히 읽었지요.
전부 읽을 힘도 없고 영어 실력도 부족했지만, 4, 5페이지는
거의 다 외울 정도가 되었어요. 술먹는 날 다른 사람들이 다 한 마디씩 얘기를 할 때
가소롭다는 듯이 뒷짐 진 채 웃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내가 이런 얘기를 하겠다고 하면서
공산당 선언을 영문으로 한 10분쯤 외우니까 사람들이 기가 안 죽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세 번쯤을 술값을 안내고 거저 먹은 일이 있습니다.
그 모임에서 제가 얻은 것도 참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사귀고 배웠습니다.
우스운 얘기를 하면, 그 때 사귄 사람 중의 하나가 무슨 일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얼마 뒤에 죽었습니다.
1980년에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잠깐 감옥에 들어갔을 때 옆방에 젊은 사람이 있었어요.
재판을 같이 받게 되었는데 그 젊은 사람이 나한테 “혹시 신 누구 아니시냐?”고 물어요.
그렇다고 했더니 이름을 대며 정 아무개를 아느냐고 그래요.
이름은 들어본 것 같다고 했더니, “옛날에 충무로에서 학생 때 함께 공부했던 키가 꽤 크고
안경 쓴 사람이 생각이 안 나느냐?” 묻더군요.
가만히 생각하니까 충남 예산 사람이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 사람은 왜 묻느냐?” 했더니 “사실은 제가 그 사람의 아들입니다.” 하더군요.
옛날 친구의 아들하고 같이 감옥을 산 거지요. 세상은 그런 겁니다. 시를 던지고 10년 동안 시골에 박혀 지내다
제가 문학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동기는 사실 단순합니다.
그 동안 저하고 함께 책을 읽던 선배가 진보당 사건으로 잡혀 들어갔어요.
죽산 조봉암 선생은 50년대에 우리 나라 최초로 남북통일은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분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다 북진통일을 주장했었습니다.
그 때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지금 관계에서 한 자리씩을 하고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총칼로 다 뒤집어 엎고 평양까지 가서 북한에 있는 사람
다 때려 죽여야지 통일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지배적인 정서였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조봉암 선생만이 “그래서는 안 된다.
북한도 같은 동포인데 싸우면 되느냐?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
평화적으로 하지 않고 전쟁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이건 백년 천년이 가도 절대 통일이 안 된다.
소련이라는 나라도 약하지 않고 미국도 약하지 않은데 누가 양보하겠느냐?”고 주장했습니다. 참 합리적인 소린데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해서 이 사람을 잡아다 죽였습니다.
이승만 정권 말기 때 일인데, 그 사건에 선배가 끌려 들어갔어요. 저는 겁이 많은데다
당장 맨날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골로 도망을 갔지요.
시골로 도망갔다고 못 잡으러 올 리는 없지만, 일단 시골로 가면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까?
박혀 살다 보니까 점점 문학에 대한 정열도 식고,
문학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회의도 생겼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여러 가지 고생도 해봤습니다. 광산에서 일도 해보고,
노동판에도 가보고 농사도 지어보고 장사도 하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과연 문학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따위의 갖가지 회의가 일었습니다. ‘일단 문학을 관둬 버리자.
무얼 할 것인가는 다음에 생각하고 일단 관둬 버리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의 10년을 시골에 박혀서 살았습니다. 제가 그 때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는, 지금도
그것만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고 물론 사람은 개인이라는 게 중요하지요.
결국은 마지막 책임은 자기가 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코 남과 함께
살지 않는 삶이라는 건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지요. 정리하면 이렇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람은 더불어 혼자 산다.
말이 이상한 얘기지만 남과 더불어 혼자 산다. 남과 더불어 살지만
결국 혼자 책임지니까 혼자 산다.
그러나 이 더불어 혼자 산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 때 제가 막연하게 생각한 것은
앞으로 시를 쓸 기회가 다시 온다면 나는 이제 나 혼자만 사는 것,
나 혼자만의 생각, 혼자만의 뜻,
이런 것에만 매달리지 말고 더불어 사는 정서,
더불어 사는 어떤 아름다움, 더불어 사는 의미들을
시로써 표현해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건 아니고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다시 저한테 글을 쓸 기회가 온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렇게 시골서 영원히 떠돌다가 끝나겠지.’ ‘어쩌다 시 한두 편 써 놓으면
누군가가 앤솔로지 따위에 발표 해주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예컨대 「해바라기의 비명」을 쓴 함형수가 있지 않습니까? 한 편밖에 남긴 것이 없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나온 사화집(詞華集) 가운데서
「해바라기의 비명」을 뺀 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사화집에라도 다 들어가 있지요. 수만 편의 시를 쓰고서도
한 편도 건질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함형수처럼 한 편을 쓰고서도 우리 문학사에 남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그러다가 제가 다시 시를 쓰게 된 것은 시인 김관식을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그가 술김에 “야, 서울에 올라가자.” 하고 잡아끄는 통에
둘이서 서울에 올라옴으로 해서였습니다.
김관식의 집은 홍은동에 있었습니다. 산중턱에 무허가로 집을 크게 짓고 살았습니다.
자기 마누라도 있고 애들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방 한 칸을 무조건 비워 주었습니다.
“이 방은 앞으로 신경림이가 쓸 거니까 그렇게 알아라.” 하며, 공짜로 방을 내주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된 거죠. 처음에는 술김에 올라와서
같이 술먹고 놀았지만, 그 때
제가 결혼한 몸이어서 혼자 살 수는 없었습니다.
시골 가서 색시를 불러서 같이 왔지요.
그 집에 데려다 놓았는데 한심한 거죠. 김관식이
우선 쌀을 다섯 말을 주고 김치도 주고 해서 생활을 시작했지요.
그래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시를 한 10여 년 안 썼다고 하지만 무척 시를 쓰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속에서 뭔가 북받쳐 올라 시를 안 쓰면 못 견딜 때가 있었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돈벌이가 없으니까 양귀비를 재배했습니다.
그걸 집에서 조금씩 만들면 상당한 돈벌이가 되었습니다.
그걸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어요. 제가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의
길 안내를 맡은 일이 있습니다.
길 안내를 해주면 돈을 주었습니다. 제가 원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성미인데다,
공짜로 먹고 돈까지 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술을 좋아해서 주막에 들르면
일단 술 먼저 먹는 걸
생애 제일의 뜻으로 삼고 있을 때여서 잔뜩 취해서 잤습니다. 눈이 며칠 동안 퍼부어 길을 다닐 수가 없을 정도가 되어,
한 주막에서 사흘 동안 매일 술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그 집 주인이라는 사람은 남로당이라고 총 맞아 죽었고,
여자가 혼자 술집을 하는데 농담을 잘하고 걸직한 소리를 잘했습니다.
매일같이 동무해서 술 먹고 그랬는데,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보니 눈이 다 그쳤어요.
울타리가 없는 시골 뒷간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하늘에 주먹만한 별들이 달려 있고
머리 위에서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참 밑에는 공사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공사장에서 불빛이 비쳐요. 그래서 마음이 얼마나 슬픈지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때는 필기도구를 안 가지고 다녔으니까 일단 속으로 시를 썼지요. 그것을 나중에 조금 정리해서 발표한 게 「눈길」이라는 시입니다.
말하자면 시를 쓰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10년 동안에 쓴 시가 그거하고
「그날」이라는 시입니다.
「그날」은 조봉암 선생이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절망적인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집 「농무」 속의 작품들은 거의 서울에서 썼지만 머리 속에는 메모가 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메모가 되어 있던 것을 서울에 와서 옮겨놨을 뿐이지요. 「농무」를 두고서
어떤 이들은 농민의 저항 의식 등을 쓴 거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게 아니고 농촌에 살면서
농민들이 갖는 어떤 농촌적인 정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더불어 사는 삶,
남과 함께 하는 삶…
이런 것들을 시로써 한번 표현해 보고자 했습니다.
제가 첫번째 얘기한 것은 시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하는 대화라는 겁니다.
따라서 명확하고 힘이 있어야 된다는 것과 두번째,
삶이라는 건 혼자 꾸려가는 건 있을 수 없고 더불어 사는 삶,
이것이 내게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자기의 개인적인 삶이라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요.
결국 책임은 자기한테 있는 거니까.
혼자 생각하는만큼 혼자 책임지는 것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나 혼자의 생각만 시로 다 표현한다면
시가 너무 왜소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그 때 했던 것 같습니다.
또 앞으로 내가 시를 쓸 기회가 생긴다면
더불어 사는 삶 쪽에 역점을 두는 시를 쓰겠다고 하는 생각도 그 때 했던 것 같습니다. 시는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을 주어야 사실 시라는 건 뭡니까? 예술 아닙니까? 말이라는 것을 소재로 한 것,
그림이라는 것이 색하고 선을 제재로 한다면 음악이라는 것이
음하고 리듬이라는 것을 율하고 격을 제재로 한다면,
문학이라는 건 말을 제재로 하고 있습니다. 예술이라는 것은 일단 첫번째로 읽는 사람들한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읽는 재미가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뜻을 담고 있어도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도 괜찮다는 얘기지요.
다른 말로 하면 독자들한테 즐거움을 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에 걸쳐 풍미한 프롤레타리아 시가 있지 않습니까.
프로문학파 시인들이 가졌던 생각은 참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시인들처럼 민족 해방에 대해서 그렇게 치열하고
또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시인들 가운데서 많지 않습니다.
당시 일제 시대에 민족주의에 앞서서 독립을 쟁취하고
평등을 이룩할 수 있는 수단이 사회주의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 프롤레타리아 시,
즉 카프 시들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가 읽을 만한 게 몇 편이나 됩니까.
실제로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아마 「현해탄」「3월이 온다」를 쓴 임화, 권환, 월북하여 「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사한
이찬, 김상훈, 박세영 등 몇몇밖에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시는 말로 된 예술이라는 인식이 모자라지 않았던가 생각합니다. 시는 예술이니까 예술이 갖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시를 읽는 즐거움이 있어야지, 그것이 없으면,
아무도 읽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내가 생각하는 옳은 것, 이것을 나만 열심히 하면 훌륭한 시가 되고,
누군가 언젠가는 다 읽어줄 것이다.
‘ 따위의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말에 대한 인식이 좀 모자랐다는 거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사람에 대한 시가 기억되지 않는 대신, 오늘날까지 그 행적을 두고
말이 많은 서정주의 시는 여러분들이 좋아하지 않습니까.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의 「문둥이」 전문 이 시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 시를 읽으면 뭔가 와 닿는 것이 있고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그맨이 떠들어서 주는 즐거움하고 예술로서의
시가 주는 즐거움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런 즐거움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탓으로 카프 시 가운데
오늘날 지금 문학사에 남은 시가 많지 않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7, 80년대에는 적지 않았습니다.
7, 80년대 민중시 중에는 좋은 시가 많았지만 개중에는 예술 인식,
말에 대한 인식이 모자랐기 때문에
결코 좋은 시로 남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 고 싶은 말을 시로써 잘하는 사람이 좋은 시인이라고 했던 워드워즈의 말처럼,
말을 잘하는가 못하는가가 시를 판가름한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말을 잘 다루는 사람입니다.
렝보, 말라르메와 함께 20세기 초에 프랑스 상징주의를 주도한 바 있는
드가의 에피소드를 빌리죠.
“내 머리 속에는 시가 가득한데 왜 시가 안 써지는지 모르겠어?” 하고 드가가 묻자,
말라르메가 말하기를 “시는 언어를 가지고 쓰는 것이기 때문이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시는 성적순이 아니며, 말을 잘 다루는 사람이 잘 쓰는 것이라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말에 대한 인식이 모자라서, 이삼십년대 프로문학이
우리 문학사에서 보잘것없는 대접을 받게 되었고,
7, 80년대의 민중시에도 일부 그런 경향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저도 민중시 계열 시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만,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좋은 내용의 시를 썼다 하더라도 그것이 언어로써 좋은 시가 되지 않으면
좋은 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이상 힘있고 좋은 살아 있는 말을 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죽 시를 써왔습니다. 제가 시를 쓰는 신조 중의 으뜸은 ‘말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말이 바로 시의 생명력이 되는 것이므로,
생명력 있는 말 하나하나를 끄집어내어 쓰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생활 체험도 말에 의해서
다시 체험될 때에만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원칙하에서 시를 써왔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사유가 아니라 직관에서 쓴다고 합니다. 체 게바라 전기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칸트의 얘기를 빌어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고 되어 있더군요.
이것은 칸트가 예술 이야기를 하면서 한 얘기죠. 예술이라는 것은
사유나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직관에 의해서
더 많이 좌우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개념 즉, 이데올로기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지요.
이 말처럼 시에서는 직관이 아주 중요하지만, 직관의 배경에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된다는 얘기와 다름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다른 말로 옮기면 ‘시적 지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 어느 길이 옳은 길인가 생각하는 태도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적 지향이 없을 때에는 좋은 시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유치환의 ‘낮달’이 있습니다.
유치환은 여느 시인들과는 달리 위선이 없는 연애시를 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에 숨어 있는 낮달을 애인과 헤어진 뒤에 가슴 속에 남은 상처에 견주어 쓴 시입니다. ‘쉬 잊으리라 그러나 잊히지 않으리라/가다 오다 돌아보는 어깨 너머로/
그날 밤 보다 남은 연민의 조각/지워도 지지 않는 마음의 여로’
아주 짧지만 감동적인 연애시입니다.
여기에 무슨 이데올기는 없습니다. 이런 시도 좋지만,
이데올로기가 있는 시가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시란 메타포 즉 은유(隱喩)입니다.
좋은 시라는 건 결국 비유를 잘한 시입니다.
네루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일 포스티노」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젊은 우체부가 찾아와 ‘시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네루다는
‘시란 메타포다.’라고 대답하지요.
두 사람이 바닷가를 걷는데, 파도가 밀려오는 걸 보고 젊은 우체부가
‘파도가 걸어옵니다’하고 말하자,
네루다는 ‘이 순간부터 너는 시인이다.
바로 바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인이다’라고 말하지요. 한 가지 사물을 다른 사물을 들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인이라는 거죠.
제 생각으로도 우리 나라에서 좋은 시인은 비유를 잘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비유를 썩잘 할수록 좋은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병철의 시에 이런 게 있습니다.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목숨 수(壽)자 박힌 정한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삽살개 앞세운 정 좀 쓸쓸하다만/고운 밤에 딸그락 딸그락 나는 가련다’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잘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나막신’이라는 제목의 짧은 시이지만 사람살이가 은유로 잘 배어 있습니다.
이 시에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은유가 있다고 느꼈고, 아직도
독자들에게 읽히는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메타포가 있기 때문에 읽히는 겁니다. 시는 교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기 때문에 읽히는 겁니다. 그 ‘존재’를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시의 존재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깨닫게 해주는
메타포를 가졌을 때, 뛰어난 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이병철의 시는 우리 문학사에서 기억되지 않으면 안될 훌륭한 시인 것입니다.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먼저 외쳐야
또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25시」를 쓴 게오르규가 한국을 찾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가 우리 나라를 방문한 1975년도에는 김지하 시인이
사형 언도를 받고 투옥되어 있을 때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지하는 꼭 죽인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죽인다고 언명을 했다.
그러니 그 사람은 꼭 죽을 것이다.’라는 소문이 돌 때였습니다.
그럴 때 게오르규가 정부 초청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세계적인 명작을 쓴 작가가,
그런 상항 속에서 정부 초청으로 우리 나라에 온 걸 보고 뜻있는 이들은 크게 분개했습니다. 그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인 시공관에서
‘시인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잠수함이 바다 밑으로 들어갈 때는 토기를 가지고 들어간다.
왜냐하면 토끼가 수압에 가장 민감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못 견딜 수압이 되면 토끼가 먼저 소리를 지릅니다.
‘ 즉 게오르규는 정치적으로 억압 상황,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 등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을 때,
못 살겠다고 가장 먼저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곧 시인이라고 은연중에 말했습니다. 한국이라는 상황은 얘기하지 않고 말한 겁니다.
비록 정부의 초청으로 왔지만 마음 먹고 한 마디 하는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어느 일본 시인은 ‘시에는 본질적으로 절규성’이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못 살게 되었을 때, 환경이 나빠졌을 때,
도덕적 타락 현상이 만연되었을 때 못살겠다고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 시인이라는 건데, 그때 저는 크게 공감했습니다. 절규성이 있음으로 해서 그 시는 역동성을 띠고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가지 도덕성의 경우에는 곧이곧대로
오늘의 잣대만을 들이대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스웨덴 같은 데서는 호적제도가 크게 바뀌어 아이들의 반수 이상이
어머니의 성을 따른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가 누군지 분명치 않기 때문입니다.
전세계적으로 가족제도가 바뀌어가는 추세 속에서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해야지,
틀에 박힌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됩니다. 결국 시라는 것은 남에게 하는 대화이되, 그것이 명확하고 힘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역시 언어라는 것은 남하고 함께 사는 데서 생긴 만큼,
시는 남과 더불어 사는 정서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중요시되지 않으면 시는 난쟁이처럼 작아진다. 세 번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소재로 하는 만큼 말이 주는 즐거움을 소홀히 해서는
좋은 시를 낳을 수 없다. 그러나 시는 본질적으로 절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을
재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또한 도덕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그 시는 생명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이런 것들이 시를 쓰는 저의 몇 가지 중요한 태도입니다
출처: http://glebat.tistory.com/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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