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눈에 띄게 하는 한 줄 글쓰기1
눈에 띄게 하는 한 줄 글쓰기1
비교과통합센터2018-10-22

0.25초, 당신의 한 줄에 사람들의 눈길이 머무는 시간.
그 눈길이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도록 관심을 끌어야 합니다.

 

길에서 잠들면 영원히 잠들 수 있습니다
노숙인에게 관심을 갖게 한 한 줄

 

IMF의 찬바람이 불던 겨울, 서울역 지하보도를 지나던 길이었습니다.
말쑥한 차림의 부부가 지린내 자욱한 바닥에 은박매트를 펴고 있었습니다.
집에서 꼭 필요한 살림만 정신없이 챙겨 나온 듯 캐리어와 짐들로 가득했어요.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들은 옆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노숙인의 이미지와 크게 달랐기 때문입니다.
노숙인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될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물론 자의에 의해 노숙하는 사람은 별개로 하고 말입니다).
그땐 저도 매우 힘든 시기였습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이 지나쳐야 하는 제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몇 년 전 지하철 역사를 거닐던 중 또 한 번 충격적인 노숙인의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보따리 짐을 맨 여성 노숙인이 역사 구석에 은박매트를 펴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남자들을 의식해서인지 처음이라는낯섦과 두려움에 가득한 눈망울로 말입니다.
그 눈망울에 비춰진 서울이 제가 처음 상경했을 때 제 눈망울에 비친 서울과 닮아 보였습니다.
마침 노숙인 긴급콜 홍보 아이디어를 떠올리던 중이었습니다. 즉시 그곳에 연락해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한 후 자리를 떴습니다.
이후 그 노숙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노숙인 긴급콜은 일반적인 노숙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성 노숙인, 아이를 동반한 노숙인, 위험에 빠진 노숙인을 시민이 신고하면
쉼터로 안내하거나 응급처치를 하는 등의 구호조치를 합니다.
이에 대한 홍보 포스터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고민이었던 거죠.
그러던 차에 여성 노숙인을 보게 되었고, 그 경험이 IMF때 목격한 가족에 대한 기억으로 연결되면서 아이디어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줄은 길에서 잠들면 영원히 잠들 수 있습니다였습니다.

 

 

 

이 포스터가 지하철 역사 등에 부착된 후 SNS에서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명카피! 이보다 더 경각심을 깨우는 광고가 있을까? (chb****)
이 포스터를 보았다. 읽고 또 읽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dbr**)
진지한 포스터인데 새벽에 보니 웃음이 나왔다. (mon****)
친구가 나를 위한 포스터래! (hop****)
웃음이 나면서도 가슴은 서늘하다. (crea****)
동사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겠기에 포스터 사진을 찍었습니다.(lon****)
길에서 잠들지 마세요. 요즘 정말 위험합니다. (jsh****)
곰돌이 인형아 길에서 자지 마요! (is4****)
이건 단순히 노숙인만을 위한 포스터가 아니었다. 술 먹고 아무데서나 잠드는 친구들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mmm****)
나름 코믹하게 잘 만든 것 같아요. (ayd****)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번호를 저장해놨어요. (ihu****)
포스터에 마음이 가 찍어봤습니다. (whi****)
지하철 타고 가는데 내 미래를 봄. (kow****)
전철을 타려는데 글귀가 눈에 들어오네요. (jun****)

 

숙련된(?) 노숙인이 아닌 초보 노숙인이나 연약한 노숙인일수록 더욱 위험한 것은 무얼까요?
겨울철 추위로 인한 동사입니다. 이 포스터도 겨울철에만 부착되었습니다.
여성 노숙인의 경우 동사만 무서운 게 아니죠. 성범죄 위험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동반한 노숙인의 경우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노숙인 중에는 시설 입소를 거부하는 경우도 많지만 어디에 시설이 있는지,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모른채 길바닥에 방치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를 해결해주는 포스터가 필요한 이유였습니다.

 

이 포스터의 타깃은 누구일까요? 노숙인이 아니라 일반 시민입니다.
신고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무심하게 포스터 곁을 스쳐가는 일반 시민을 겨냥한 한 줄이
“위험에 빠진 노숙인은 아래 번호로 신고해주세요” 정도라면 어느 누가 관심을 가질까요?
게다가 포스터는 이미 사람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전통 매체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가장 좋은 건 주의를 환기할 수 있는 충격적인 한 줄입니다.

 

다만 충격에도 여과장치가 필요합니다.
동사 등으로 인해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메시지를 그대로 내보내면 오히려 외면당합니다.
포장이 안 된 ‘날것 그대로의 충격’은 안 하느니만 못하므로, 길에서 영원히 잠들 수 있다는 표현으로 순화한 것입니다.
다만 이 한 줄 역시 위협의 수위가 여전히 높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노숙인의 이미지를 넣는 대신 곰 인형으로 대체하여 이를 상쇄시켰습니다.